'유학파' 서울대 성악과 강사가 '송곳'이 된 이유

허남설 기자

“우리끼리는 스스로 ‘돈 못 버는 연예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해요. 성악하는 남편을 둔 아내들의 모임은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보릿고개’. 돈이 들어올 때 확 들어오지만 안 들어올 땐 정말 안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성악하는 아내를 둔 남편들의 모임은 ‘가시밭길’이라고 해요(웃음). 무대에서 화려하게 꾸민 모습들을 보고는 마냥 베짱이처럼 살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희도 똑같아요. 부모님 밑에서 편안하게 살았어도 사회에 홀로 나와서 약자 입장이 되면 싸울 수 밖에 없는 거죠.”

서울대 음악대학 강사 전유진씨(44)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2일 전씨를 만난 곳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대학본부 앞 천막 농성장. 지난해 12월 29일 음악대학 성악과 시간강사들이 천막을 세웠다. 이들은 2014년 12월 공채로 임용됐다. 음대는 보통 5년마다 공채를 시행했다. 그런 대학당국이 지난달 1년 만에 새 채용공고를 냈다. 전씨는 별안간 1년짜리 ‘파리목숨’ 계약직이 됐다. 강사 113명 중 상당수가 ‘대량해고’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전씨를 만난 날, 기온은 하루종일 영하를 맴돌았다. 비닐로 엉기성기 만든 천막 출입구에선 찬바람이 들락거렸다. 천막을 싼 비닐 위에 ‘집단해고 갑질하며 세계적 대학이 되겠는가’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천막 안 한 쪽에 컵라면과 생수가 쌓여 있었다. 식은 공기밥도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장부터 옷차림까지 단정하게 갖춰입은 전씨의 모습은 천막농성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전씨는 전형적인 ‘음악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서울예고와 서울대를 거쳐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7년부터 시작해 올해 10년차 강사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어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는 한겨울 불안정 고용에 맞서싸우는 ‘송곳’이 됐다.

“지방에서부터 강사를 시작했어요. 사실 한국에선 강사를 하려면 소위 ‘빽’이 있어야 하는 거지, 실력으로 뽑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10년 만에 지난해부터 모교인 서울대에서 강의를 맡게 된 거예요.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강의했죠. 사람들은 한번에 3~4군데에서 강의하면 떼돈을 벌 거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나가도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벌어요.”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선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음악이 전공인 강사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대학 강의 외에도 과외(개인레슨)를 하거나 공연을 하면서 돈을 꽤 벌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요즘 농성 중인 음대 시간강사들도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듣고 있다. ‘배부른 음악인들의 투정’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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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고전 음악(클래식)을 하나요. 이제는 수요가 많이 줄었어요. 요즘 학생들은 거의 다 실용음악과를 가려고 하는 추세죠. 다른 대학에선 성악과가 폐과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어요. 저희도 과외를 하고 싶죠. 사실 ‘서울대 타이틀’을 걸면 과외가 좀 들어오지 않을까란 기대도 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죠. 그럼 사실 강단에 서서 받는 강의료가 강사들한테 굉장히 중요해요. 서울대에서는 2학점 강의 맡으면 한달에 64만원 정도 받는데 다른 사립학교에서는 이것보다 더 낮아요. 그나마 국립대학에선 강의료가 높은 편인데, 사립대학은 그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더라고요.”

물론 대학 강단에 서는 건 성악가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전씨는 강사 자리를 “우리 직업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국은 대학에 출강하지 않으면 연주 기회조차 얻기 힘든 나라”라며 “결국 노래를 많이 하고 싶어서 강사나 교수 자리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력’보다는 ‘타이틀’을 강조하는 한국 특유의 음악계 풍토를 꼬집은 말이었다.

현재 음대 강사들은 2014년 12월 나온 채용공고에 따라 그렇게 원하던 강단에 서게 됐지만, 1년 만에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음대가 그간 5년마다 내던 채용공고를 1년마다 내겠다고 방침을 바꾼 것이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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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말에 곧 새 채용공고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이 돌 때 저도 전화를 받고 강사들이 모인 자리에 나갔어요. 알음알음 연락이 닿은 10여명이 나왔죠. 일단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오히려 대학 측에 밉보이지 않을까란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바로 12월2일에 채용공고가 음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왔죠. 사실 ‘멘붕’이었어요.”

당시는 국회에서 이른바 ‘시간강사법’이 통과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시간강사들의 반발과 법안의 문제점 지적이 잇따르자 결국 다시 2년을 유예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 음대 강사들은 반색했다. 새 채용공고가 철회될 것으로 보고 다시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총장과 보직교수들한테 e메일로 탄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대학의 방침은 유지됐고, 서류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 일정이 잡혔다.

음대 강사들은 대학본부 앞에 천막을 쳤다.

“천막을 쳐서라도 오디션을 막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돌이켜보면 너무 안일한 생각에서 나온 퍼포먼스였죠(웃음). 전 바로 반응이 올 줄 알았는데 정말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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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는 현재 시간강사 농성 전면에 나서고 있다. 기자회견에서도 마이크를 잡는 사람도, 방송과의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도 그다. 좁디좁은 음악계에서 앞으로의 입지가 걱정거리가 될법도 한데, 전씨는 후배 강사들을 대표해 ‘브레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여성강사들 중엔 제가 두번째로 학번이 앞섰어요. 후배들이 ‘어떡하냐’며 저만 바라보고 있었죠. 동호회나 학술모임의 장을 맡아본 적은 있지만, 사실 이건 반기를 드는 일이라서 누구나 다 나서기 조심스럽고 겁내는 일이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쩌다보니 제가 앞에 서있더라고요(웃음). 제 이름은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을테니 그냥 앞에 나서고 있어요.”

전씨는 “음대 출신들이 천막 농성을 하는 게 서울대 역사상 처음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다른 강사들 중에도 전씨처럼 해외 유학을 거친 성악가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노숙 농성은 익숙한 일은 아니다. ‘투쟁’에 앞장선 전력 때문에 강사 채용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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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한테 혼날 걸 각오하고 ‘잘못하면 앞으로 한국에 발 못 붙일 수도 있대’하고 말했더니, ‘어차피 하는 거 열심히 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부모님도 종일 ‘종편’만 보실 정도로 보수적인데 ‘네가 아빠를 닮아서 불의를 못 참고 용맹스럽지. 부디 몸만 챙겨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단지 비정규 강사라는 이유만으로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해촉되는 건 불합리한 거잖아요.”

요즘 그는 성악가들의 농성에 대해 ‘강의 안 하면 공연이나 개인레슨해서 돈 벌면 되지’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다소 아쉽다. 요즘 그의 생각은 오로지 이 농성을 ‘예술가답게,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 데 있다. 전씨는 말했다. “다만 무대가 있을 뿐이지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천막 농성장에 온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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