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교수, 현장의 목소리 8 -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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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4-26 15:04 조회4,5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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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교수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신화를 넘어서
2018.04.23 임순광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위원장
지난 16년 간 필자는 대학, 정부, 국회와 수백 차례 접촉하며 비정규교수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여러 신화에 대해 비판하고 다툴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맞닥뜨린 신화는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교수는 대학을 잠시 거쳐 가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강사에게 사실이 아니다. 강사를 비롯한 상당수의 비정규교수에게 현재의 위치는 엄연한 하나의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외면한 정부와 국회는 오랜 세월 이들에 대한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대학들도 정보 제공을 꺼렸다. 그러다 비정규교수가 힘에 겨워 자살하면 급조된 말잔치를 벌이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곳이 대학과 정부와 국회였다. 지금도 비정년트랙 전임교원, 겸임교수와 초빙교수 등의 다양한 비전임교원에 대한 제대로 된 전국적 실태조사 결과는 없다. 강사에 대한 자료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올바른 대책을 내놓겠는가. 전면적 실태조사를 통해 비정규교수 직업군이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게 시급하다.
두 번째 상대한 신화는 ‘비정규교수는 식구가 아니다’라는 대학 측의 인식이었다. 식구가 아니기에 정규교수와 직원들은 비정규교수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했고 문제 해결도 외면해 왔다.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다. 복리후생비도, 전용 공간도, 의사결정권도, 총장선출권도, 연구비도, 상대적 고임금도 모두 자신들은 정규직이고 식구니까 당연히 받는 것이고 비정규교수는 식구가 아니기에 안 준다는 식의 차별적 인식을 너무나 자주 접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양극화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문제가 대학에서 가장 심각함을 깨닫게 되었다. 비정규직 철폐 또는 차별 해소,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학교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의 과제가 국가적 과제로 대두된 지 오래이건만 대학 비정규교수들은 모두 자동 적용대상에서 배제돼 있다. 이를 활용해 대학들은 여러 핑계를 대면서 권리보장과 처우개선에 눈감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입법 활동과 정부 예산 지원과 대학에 대한 여러 정책적 방법을 활용해 대학이 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의 첨병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평등한 학교 없이 평등한 사회는 없다. 노동 존중의 나라도, 민주시민교육도, 인권과 화합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세 번째 신화는 교육자 이데올로기이다. ‘교수는 노동자가 아니다’, ‘교수가 일을 안 하면 학생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저 참아야 한다’, ‘교수가 무슨 돈과 권리를 밝히느냐’, ‘교수는 단결하고 투쟁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내적으로 수행하는 자’라는 식으로 구성된 교육자 이데올로기는 비정규교수를 통제하는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부당함에 맞서 울분에 찬 비정규교수들이 저항의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이들이 국가전복세력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지배층의 대응이 무색할 정도로, 비정규교수들은 스스로의 힘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게 해왔다. 그러다보니 다른 노동자들은 비정규교수의 현실을 접할 때마다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이토록 처참한 줄 몰랐다’는 반응이다. 다른 한 번은 ‘그런데도 이런 꼴로 계속 참고 사느냐’는 놀라움이다. 바보들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표정으로는 확실하게 드러내면서 말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평균 수명 100세라는 호모 헌드레드 시대를 맞아 필자는 그동안 강조되지 않았던 네 번째 신화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정규교수 문제 해결법을 대학 안에서만 찾으려는 인식이다. 거대하고도 부실하게 몸집이 부풀려져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개별 대학 안에서, 비정규교수가 자신에게 배정된 한 두 강좌를 지키거나 임금 소폭 인상의 방식으로만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갈고닦은 역량을 대학 안팎에서 나누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가령 전국의 교정시설, 수천 개의 행정복지센터 시설, 공공도서관, 구청과 시청 강당, 마을교육공동체 공간, 노인시설, 각종 주민자치시설 등을 활용해 중앙정부-지자체-교육청이 재정과 인력을 대어 함께 운영하는 ‘온 국민 평생고등교육 증진 프로젝트’를 국가적으로 기획하는 것도 고민해 봄직하다. 몇 사람의 인문학 협동조합 수준이나 일부 구청의 편향적 교양강좌 개설 수준을 넘어 10만 명 이상의 현직 비정규교수, 퇴직교사와 교수(비정규교수 포함) 등이 주축이 돼 대학 바깥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한 다양한 ‘비학위 무료 평생고등교육 강좌’를 여는 것은 비정규교수들의 역량 발휘 기회와 수입을 확대함과 동시에 국민의 행복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인들의 고등교육 열망도 충족할 수 있다. 이번 교육감선거나 지방선거에서 진일보한 방식이 제안되길 기대한다.
지금 대학가는 ‘폐교’와 ’해고‘의 문제와 함께 ’교수직의 비정규직화’라는 홍역을 앓고 있다. 최근 10여 년 간 불안정노동 상태의 저임금 전임교원들이 급증했다. 또한 2010년 ‘교원 외 교원’ 논쟁으로 촉발된 강사법의 종착점은 ‘무늬만 교원’ 양산으로 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사법의 ‘다른 비전임교원으로의 풍선효과 유발’과 ‘강사 책임시수 9시간 이상 강제 적용’으로 인해 강사 대량해고의 파국이 목전에 와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정규교수를 대학의 식구가 아닌 지나가는 과객쯤으로 인식하는 데서 파생된 기괴한 결과물이다. 이 괴물은 비정규교수의 저항이 없으면 더욱 자가증식할 공산이 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존재 근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제대로 교육하고 연구하고 학생과 소통할 안정적 교원이 없는 대학의 종말, 그것이 앞의 신화들이 가리키고 있는 종착지이다.
대학과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厚顔無恥, 指鹿爲馬하는 방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正道를 걸어야 할 것이다. 안정적 교원 확보와 비정규교수 고용과 권리 보장을 통한 교육의 질 향상과 학문 성숙, 대학 안팎에서의 평생고등교육 실시, 그것이 위기의 시대에 대학으로서의 본령을 조금이나마 지키는 방법이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첫 번째 맞닥뜨린 신화는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교수는 대학을 잠시 거쳐 가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강사에게 사실이 아니다. 강사를 비롯한 상당수의 비정규교수에게 현재의 위치는 엄연한 하나의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외면한 정부와 국회는 오랜 세월 이들에 대한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대학들도 정보 제공을 꺼렸다. 그러다 비정규교수가 힘에 겨워 자살하면 급조된 말잔치를 벌이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곳이 대학과 정부와 국회였다. 지금도 비정년트랙 전임교원, 겸임교수와 초빙교수 등의 다양한 비전임교원에 대한 제대로 된 전국적 실태조사 결과는 없다. 강사에 대한 자료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실태파악조차 제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올바른 대책을 내놓겠는가. 전면적 실태조사를 통해 비정규교수 직업군이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게 시급하다.
두 번째 상대한 신화는 ‘비정규교수는 식구가 아니다’라는 대학 측의 인식이었다. 식구가 아니기에 정규교수와 직원들은 비정규교수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했고 문제 해결도 외면해 왔다.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다. 복리후생비도, 전용 공간도, 의사결정권도, 총장선출권도, 연구비도, 상대적 고임금도 모두 자신들은 정규직이고 식구니까 당연히 받는 것이고 비정규교수는 식구가 아니기에 안 준다는 식의 차별적 인식을 너무나 자주 접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양극화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문제가 대학에서 가장 심각함을 깨닫게 되었다. 비정규직 철폐 또는 차별 해소,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학교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의 과제가 국가적 과제로 대두된 지 오래이건만 대학 비정규교수들은 모두 자동 적용대상에서 배제돼 있다. 이를 활용해 대학들은 여러 핑계를 대면서 권리보장과 처우개선에 눈감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입법 활동과 정부 예산 지원과 대학에 대한 여러 정책적 방법을 활용해 대학이 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의 첨병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평등한 학교 없이 평등한 사회는 없다. 노동 존중의 나라도, 민주시민교육도, 인권과 화합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세 번째 신화는 교육자 이데올로기이다. ‘교수는 노동자가 아니다’, ‘교수가 일을 안 하면 학생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저 참아야 한다’, ‘교수가 무슨 돈과 권리를 밝히느냐’, ‘교수는 단결하고 투쟁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내적으로 수행하는 자’라는 식으로 구성된 교육자 이데올로기는 비정규교수를 통제하는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부당함에 맞서 울분에 찬 비정규교수들이 저항의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이들이 국가전복세력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지배층의 대응이 무색할 정도로, 비정규교수들은 스스로의 힘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게 해왔다. 그러다보니 다른 노동자들은 비정규교수의 현실을 접할 때마다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이토록 처참한 줄 몰랐다’는 반응이다. 다른 한 번은 ‘그런데도 이런 꼴로 계속 참고 사느냐’는 놀라움이다. 바보들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표정으로는 확실하게 드러내면서 말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평균 수명 100세라는 호모 헌드레드 시대를 맞아 필자는 그동안 강조되지 않았던 네 번째 신화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정규교수 문제 해결법을 대학 안에서만 찾으려는 인식이다. 거대하고도 부실하게 몸집이 부풀려져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개별 대학 안에서, 비정규교수가 자신에게 배정된 한 두 강좌를 지키거나 임금 소폭 인상의 방식으로만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갈고닦은 역량을 대학 안팎에서 나누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가령 전국의 교정시설, 수천 개의 행정복지센터 시설, 공공도서관, 구청과 시청 강당, 마을교육공동체 공간, 노인시설, 각종 주민자치시설 등을 활용해 중앙정부-지자체-교육청이 재정과 인력을 대어 함께 운영하는 ‘온 국민 평생고등교육 증진 프로젝트’를 국가적으로 기획하는 것도 고민해 봄직하다. 몇 사람의 인문학 협동조합 수준이나 일부 구청의 편향적 교양강좌 개설 수준을 넘어 10만 명 이상의 현직 비정규교수, 퇴직교사와 교수(비정규교수 포함) 등이 주축이 돼 대학 바깥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한 다양한 ‘비학위 무료 평생고등교육 강좌’를 여는 것은 비정규교수들의 역량 발휘 기회와 수입을 확대함과 동시에 국민의 행복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인들의 고등교육 열망도 충족할 수 있다. 이번 교육감선거나 지방선거에서 진일보한 방식이 제안되길 기대한다.
지금 대학가는 ‘폐교’와 ’해고‘의 문제와 함께 ’교수직의 비정규직화’라는 홍역을 앓고 있다. 최근 10여 년 간 불안정노동 상태의 저임금 전임교원들이 급증했다. 또한 2010년 ‘교원 외 교원’ 논쟁으로 촉발된 강사법의 종착점은 ‘무늬만 교원’ 양산으로 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사법의 ‘다른 비전임교원으로의 풍선효과 유발’과 ‘강사 책임시수 9시간 이상 강제 적용’으로 인해 강사 대량해고의 파국이 목전에 와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정규교수를 대학의 식구가 아닌 지나가는 과객쯤으로 인식하는 데서 파생된 기괴한 결과물이다. 이 괴물은 비정규교수의 저항이 없으면 더욱 자가증식할 공산이 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존재 근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제대로 교육하고 연구하고 학생과 소통할 안정적 교원이 없는 대학의 종말, 그것이 앞의 신화들이 가리키고 있는 종착지이다.
대학과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厚顔無恥, 指鹿爲馬하는 방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正道를 걸어야 할 것이다. 안정적 교원 확보와 비정규교수 고용과 권리 보장을 통한 교육의 질 향상과 학문 성숙, 대학 안팎에서의 평생고등교육 실시, 그것이 위기의 시대에 대학으로서의 본령을 조금이나마 지키는 방법이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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