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마니타스가 준 선물, 크리스마스 이브 해고 -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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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22 10:53 조회5,5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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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없애고도 비상하겠다는 발판은 무엇인가
2016. 01. 21. 채효정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이렇게 많은 강좌가 사라졌는데, 저 비상의 발판이 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시간강사의 뼈를 깎아 만든 배, 내가 타고 온 배는 그렇게 어두운 밤바다에 쓸모없어진 사람들을 조용히 버리고는 축포를 터뜨리며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온 배는 어두운 밤바다에
쓸모없어진 사람들을 조용히 버리고는
축포를 터뜨리며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4개월짜리 근로계약서 작성
자기 사업장 노동자가 당하는 차별 외면하면서
비정규직 철폐 외치는 진보는 위선
아무리 신산했던 세월이었다고 해도, 일년에 하루 저녁 정도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진 그런 시간이 있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이브 같은 날. 아이들과 마주 앉아 귤이라도 까먹으면서 오늘 밤 산타가 가져다 줄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그런 밤. 그런 날에 굳이 해고 메일을 보낼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연휴가 끝나면 해고 사실을 알게 될 비정규직 노동자라도, 그런 작은 행복은 굳이 깰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무감하고 무심한 행정 처리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런 행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뿐이다. 아무리 행정 관료들이 ‘시멘트 가슴’이라고 해도 높은 양반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순간에도 그렇게 무감하고 무심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고 메일을 받았다는 건, 그걸 보낸 사람들에게 있어 ‘마음’이라든가, 삶의 작은 행복이 산산조각 나는 일 따위란 전혀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의미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고 통보를 받고서,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런 사람’, 나는 대학의 시간강사였다.
67명의 강사들에게(어떤 셈법인지 나중에는 45명으로 줄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고 메일을 보낸 곳은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다. ‘후마니타스(humanitas)’란 ‘인간다움’을 뜻하는 고대 라틴어로 ‘인간을 인간으로 기르는 교육’이란 의미에서의 ‘인문학’, ‘인문교육’, ‘교양교육’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희대가 2011년부터 시작한 ‘교양교육’을 전담하는 교양대학에 붙인 이름이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교육을 한다는 곳인데, 노동은 그렇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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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기사는 연결
그래도 이번에 ‘교수님의 학문적 건승을 기원합니다’라는 점잖은 말로 해고 메일을 받은 것은 상당한 진보다. 예전에는 해고 통보 자체도 없었다. 그저 학기말에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면 다음 학기 강의가 없는 것이다. 문자로 노동자에게 해고 통보를 보내 비난을 받았던 사건을 보고서, 그조차 부러웠던 것이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는 우리들이었다. 가방끈 긴 바보들. 이 바보들은 강단에선 교수인 줄 알고, 책상머리에선 학자인 줄 알고 살다가, 잘릴 때 비로소 자신들이 쓰다 아무 때나 버릴 수 있는 소모품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안다.
해고 메일을 보낸 그 날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교과개편을 홍보하는 기사를 한 중앙일간지에 실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명도 없는, 학교의 홍보내용을 그대로 받아 실은, 사실상의 기사형 광고에 가까운 글이었다. ‘후마니타스칼리지 제 2의 비상(飛上)’이라는 기사는 강사들을 대량 해고시킨 원인이 된 ‘교과개편’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멋지게 포장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현대자동차가 뒤로는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면서 앞으로는 언론에다 신차 출시 기사를 터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구조조정이라는데, 세계적 기업으로 비상한다고 하는데, 노동자 몇 명 해고된 것을 어찌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었다. 학교가 이렇게 제 2의 비상을 하겠다고 노력을 하고 있는 데 그 구조조정 과정에서 몇몇 강사가 해고된 것을 문제 삼으면, 그건 비상하는 새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 기사 하나로 이제 우리는 입도 벙긋 못할 신세가 된 것이다. 소리한 번 질러볼 틈도 없이 조용히 압살당하는 기분이 그런 것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강좌가 사라졌는데, 저 비상의 발판이 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시간강사의 뼈를 깎아 만든 배, 내가 타고 온 배는 그렇게 어두운 밤바다에 쓸모없어진 사람들을 조용히 버리고는 축포를 터뜨리며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알았다. 이것이 단순한 행정의 무심과 무감이 아니라, 권력의 과시요, 조용한 살인이라는 것을. 해고된 날의 팡파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었고 반대로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임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치워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대학 강사라는 신분은 법이 보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만큼도 갖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법이 없어 ‘해고’조차 될 수 없는 존재였다. 학교에서는 ‘해고’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고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란다. 강사 위촉을 해지하였기에 ‘해촉’이며, 다음 강의를 의뢰하지 않으므로 ‘미의뢰’이고 강좌를 개설하지 않았으므로 ‘비개설’이란다.
이러니 대학강사 입장에서 보자면 해고당할 수 있다는 것마저도 부러운 일이다.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이라도 하려면, 먼저 ‘해고된 존재’로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학기초가 되면 4개월짜리 초단기 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 봄학기는 3월부터 6월까지. 가을학기는 9월부터 12월까지. 사실상 일 년에 두 번씩 해고되는 셈이지만 이런 계약서를 쓰기 때문에 부당해고 판단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는 ‘갱신기대권’, 즉 근로계약이 다시 갱신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받기가 힘들다. 계약의 개시와 종료의 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수년간 같은 학교에서 강의를 해왔다고 해도 이 4개월짜리 초단기 기간제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면 모든 것이 불리해진다. 하지만 여기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강의를 할 수 없으니 반강제적인 구속 계약이다. 노동의 권리도 보장되지 않고 해고당할 권리마저 없는, 참으로 이상한 계약. 10년을 일하고도 하루 아침에 잘릴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계약이 있다면 이런 노동계약 자체가 불법이고 위헌이 아닌가. 개념상의 법리적 검토가 그것을 ‘해고’로 성립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으로 이 ‘해고될 수 없는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이들의 노동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며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고, 이들이 법 밖에 내동댕이쳐진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 법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노동인권이 이렇게 유린되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점에서 이 악랄한 시간강사제도 하의 노동은 근본적으로 부당노동이고 강사들이 당하는 해고는 모든 해고가 사실상의 부당해고이다. 그래서 법을 요구한다. 법이 없기에 법을 요구한다.
대학 강사에게 교원의 지위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강사법이 하루 속히 필요한 이유다. 강사법이 제정되기 전이라도 내가 있는 대학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차별적인 내규들을 철폐하고 강사의 안정적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투쟁은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일터에서 노동의 권리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학 내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당한 정치적 몫에 대한 요구, 즉 정치적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기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당하고 있는 차별을 외면하면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진보는 위선이다. 바로 옆의 동료가 당하는 착취의 상태에 눈 감은 채로 자유를 외치고 정의를 외치고 평등을 가르치는 교육은 거짓이다. 그들의 인간성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박탈하면서 지금 우리는 어떤 인간성(humanitas)을 외치고 있는 것인가. 시간강사는 오늘의 대학에서 그 자기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존재다. 괴물이 되어버린 대학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들이 지금처럼 존재하는 한 대학은 수치와 야만의 공간이다. 이 대학이 ‘후마니타스’, 인간의 얼굴을 되찾을 때까지 나는 부끄러움을 증언하는 존재이고자 한다. 지금까지 싸우지 않았던 것을 부끄러워하며 내가 있는 곳, ‘지금-여기’서 싸우는 존재가 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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